국민일보
2000.10.24 (화) 18:19
방사능보다도 생태계에 더 위험한 것은 인간의 손길인가.
죽음의 땅으로 치부되고 있는,그래서 출입 금지지역인 체르노빌 핵발전소 주변 땅이 찬란한 생태계의 보고로 거듭나고 있다고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 최신 주말판이 보도했다.
1986년 핵발전소 사상 최악의 방사능 누출사고 이후 설정된 ‘체르노빌 추방구역’은 사고를 일으킨 핵반응로 반경 30km 지역이다. FT에 따르면 이곳에는 현재 다양한 야생 동·식물들이 깃들이고 있다.텃새 180종을 포함한 270종의 조류와 늑대,산돼지,말코손바닥사슴 등의 포유류가 숲속을 노닐고 호수와 강에는 온갖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다.이곳에의 출입이 허용된 과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국제적인 멸종위기 동?식물 40종이 발견됐다.
과학자들은 현재 추방구역 외곽의 정착촌인 슬라부티치에 국제 방사능생태학 연구소를 설치하고,더 없이 적합한 이 자연실험실을 관찰하고 있다.연구진의 일원인 영국 과학자 짐 스미스는 “체르노빌에 대한 일반인들의 상투적 생각인 황량한 생태계와는 매우 대조적”이라고 FT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미국 조지아대학의 론 체서 교수도 “대부분 사람들은 체르노빌이라면 다리가 둘 달린 개구리,거대한 벌레 및 고질라와 같은 괴물을 떠올리지만,이곳은 매우 아름다워서 가이거 측정기가 없다면 상당히 오염된 지역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추방구역내 토양과 식물,심지어 동물조차 가이거 측정기를 들이대면 매우 높은 방사능 수치가 나온다.밭쥐와 같은 설치류의 경우 미국 핵발전소 주변에 서식하는 동물들에서 측정된 가장 높은 수준보다 10배나 더 많은 방사능이 검출된다.과학자들은 체르노빌 주변 동?식물에서 유전자 변이를 발견했지만,손상이나 기형의 조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이달초 과학잡지 네이처에 발표된 가장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훼손된 핵반응로 가까운 곳에서 자라는 밀에서 예상보다 훨씬 높은 유전자 돌연변이율이 포착됐다.
이처럼 체르노빌 원전 주변의 동?식물들이 탈없이 잘 자라고 있다는 점은 하나의 절묘한 역설로 지적되고 있다．방사능이 개별 식물과 동물이 암에 걸리거나 기형이 될 확률을 높이긴 하지만 이같은 영향은 사람이 주변에서 사라진데 따른 서식 환경의 개선에 의해 상쇄되고도 남는다는 가설이다.스미스는 이와 관련,체르노빌 주변에서 가장 눈에 띄게 줄어든 종은 인간과 가장 가까운 쥐와 야생비둘기였다고 밝히고 “방사능 누출 사고가 생태계에는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자연의 놀라운 자기 복원능력을 목격하고 있는 과학자들의 또 다른 관심사는 유럽의 다른 습지와 마찬가지로 농경지로 바뀌었던 체르노빌 인근의 광활한 옛 습지에 다시 물이 차고 있다는 사실이다.추방지역은 거대한 농경지와 도시의 땅이 자연상태로 되돌아갈 때 어떤 일이 발생할 지를 살펴볼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임항기자 hngl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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