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2000/10/28 11:21
“선생님,이곳에 칠하면 어떨까요”
“경아야,그보다는 더 밑부분에 먹선을 좀더 줘야지．이곳에도 칠 좀 하고”
26일 오후 서울 상계6동 서울시립뇌성마비종합복지관 지하 1층 미술교실에서는 김경아씨(32)가 발가락에 붓을 끼고 힘겹게 산수화를 그리고 있었다．손을 전혀 못쓰는 뇌성마비장애인인 김씨는 한획 한획 긋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지만 붓끝을 보는 그의 시선은 자못 진지하다．옆에서 지도하는 최백옥씨(60)는 몸을 비틀며 그림그리는 경아가 여백을 메우도록 자상하게 이끌고 있다．
뇌성마비 아이들은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30분부터 2시간 동안 이곳에서 시작되는 그림,서예시간을 손꼽아 기다린다．9년째 자신들을 지도해온 최씨가 이곳에 찾아오기 때문．이 시간만 되면 붓 하나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장애인이라는 굴레를 마음껏 벗어던질 수 있다．일반인들은 알아듣기 힘든 더듬거리는 말투에 자상하게 응답하며 그림을 가르쳐주는 최씨는 이 순간만은 어머니보다 따뜻한 존재다．
서울 은평 평화교회권사인 최씨도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이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하다．하나님이 자신의 달란트를 쓰라고 장애인들을 만나게 했다는 확신 때문이다．최권사가 이들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92년 가을．지난 89년부터 노원부녀복지관(현 노원부녀활력센터)에서 학생·주부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던 중 뇌성마비종합복지관측의 요청으로 이곳에 오게 됐다．
방문 첫날 최권사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알아듣지 못하는 말에 뒤틀린 몸을 가진 아이들．최권사는 사람의 정에 굶주린듯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이들을 본 뒤 복지관 인근 마들근린공원의 낙엽을 밟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깨달았다．그동안 노인정 고아원 등 여러 소외 이웃 봉사를 다녔지만 뇌성마비장애인에게만큼 전율을 느낀 적은 없었다．또 자신의 평생 스승이면서 말을 못하는 운보 김기창 화백의 존재가 장애인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끼게 했다．김화백은 70년대 초반 대학 국문과 출신인 최권사의 그림 재능을 알아보고 이를 개발토록 독려해 줬다．최권사가 현재 많은 작품활동을 벌이고 여러 곳에서 미술 강의를 하기까지에는 김화백의 격려와 지지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가르치는데 단순한 애정만으로는 부족했다．많은 차별과 시련 속에 자란 뇌성마비장애인들은 자신의 뜻을 표시하는 것에 익숙지 않아 거친 행동을 보였다．또 서로 싸움도 많이 해 번번이 미술도구가 망가지기도 했다．하지만 최권사는 이들에게 언제나 미소로 응대했다．최권사에게 투정만 부리던 이들도 그의 끊임없는 웃음앞에 자연스럽게 붓을 들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그림그리기는 산 넘어 산이었다．동양화 4군자의 한 획을 긋는 것조차 장애인들에겐 강행군이었다．일반 아이들은 불과 몇초면 될 일이 5분 이상 걸리기 일쑤였다．싸우고 소란피우던 이들도 시간이 흐르자 정서적 안정을 되찾았고 붓을 들며 마음속의 서러움을 녹여버리는 듯 했다．
어느덧 최권사의 수제자도 탄생했다．손을 못써 발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김경아씨가 그다．발을 손처럼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김씨는 지난해 ‘미의 표상전’에 출품했으며 지난달 22일 마들근린공원에서 개최된 뇌성마비인의 축제 ‘오뚝이축제’에서 미술부문 금상을 수상하는 등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김씨는 몇 차례 매스컴에도 출연,복지관내 스타로 불린다．두 손과 발을 못써 입을 이용,그림그리는 민지영씨(24)와 산수화를 잘 그리는 임현정씨(28)도 수준높은 실력을 갖췄다．
최권사의 아름다운 헌신은 어느덧 입소문이 나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 사랑에 동참하기 시작했다．모 교회 권사는 매년 두차례씩 휠체어를 최권사에게 기부하고 있으며 장애인들의 그림 값을 복지관에 전액기증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최권사는 “그림을 배워 장애인들을 가르치는 것은 달란트를 소중히 사용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라면서 “한평생 이들과 함께 그림 그리며 인간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겠다”고 말했다．
◆최백옥씨는…
최백옥 권사는 하나님에게 철저히 순종하는 어린 양이다．한국전쟁 당시 교회에서 나눠주는 우유와 빵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영접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생활이 안정을 찾아가자 그의 신앙도 조금씩 마모됐다．
그러던 중 지난 81년 경기도 성남으로 이사간 친구를 만난 뒤 버스를 타고 되돌아오다 대한극장앞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목숨이 위태롭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입원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목사의 안수기도 덕분에 기적처럼 건강을 되찾았다．이후 그는 신앙에의 헌신이라는 목표에 삶의 모든 것을 맞췄다．
그가 뇌성마비장애인에게 사랑의 그림을 가르치게 된 것은 이같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심과 그의 스승인 운보 김기창 화백과의 인연에서 비롯됐다．학창시절 국문학도였던 그는 취미로만 삼았을 뿐 전문적으로 그림을 접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71년 어느날 남편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미술계의 대가 운보 선생을 만나면서 인생행로에 획기적인 변화가 왔다．그는 말못하는 스승에게 필답으로 사사했으며 타고난 재능과 성실성으로 사랑받는 제자가 됐다．
화단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던 최권사는 뇌성마비복지관의 미술수업 제의를 받는 순간 “이제야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쓰게 됐다”고 기뻐했다．그림에 열중한 뇌성마비장애인들의 눈망울 속에서 스승 운보의 진지함을 엿보기도 했다．
최권사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수순이라고 봐요．앞으로 이같은 장애인들에게 그림뿐만 아니라 사랑의 복음도 전해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주고 싶습니다”라고 소망의 한 자락을 밝혔다．
/고세욱기자 swk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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